작성자 김도한(ehgks34) 시간 2023-01-19 21:3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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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1모임 선생님들과 함께 1월 9일부터 3박 4일 동안 제주 4.3 사건의 유적지를 답사하였습니다. 모아재 선생님들과 그 날의 생생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첫 날 찾은 곳은 4.3 사건 당시 최대 피해마을이었던 북촌리 북촌초, 그리고 이 곳에서 무참히 희생당한 어린아이들의 무덤 너분숭이 애기무덤이었습니다. 잔디나 변변한 장식 없이 초라하게 자리하고 있는 모습에 더 가슴이 아팠고, 참배객들이 두고 간 장갑과 양말, 장난감을 보니 빈 손으로 온 스스로가 미안하고 부끄러워집니다.

이어서 간 곳은 선흘리 주민 200여명이 은신하다 희생당한 목시물굴, 하도리와 종달리 주민 11명이 은신하다 희생당한 다랑쉬굴입니다. 주민들에게 굴은 생존을 위한 공간이자 죽음의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다랑쉬굴 앞에는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11송이의 마른 국화가 놓여있었습니다. 다음번에는 애기무덤에 놓을 과자와 함께 국화를 꼭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둘째 날은 신대광 선생님의 소개로 4.3 평화기념관에서 한상희 교감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동굴을 재현한 입구와 아직 이름 짓지 못한 4.3 백비를 시작으로 하여 한상희 교감선생님의 해설을 들으며 모두 6개의 전시실을 둘러보았습니다. 4.3 사건의 도화선이 되었던 관덕정 3.1 발포사건과 3.10 총파업과 탄압, 4.3 봉기, 이후 초토화 작전의 직접적 원인이 된 5.10 단선 단정 반대 사건과 이어진 학살, 이후 진행된 진상 규명 운동의 과정까지. 한상희 교감선생님 덕분에 4.3 사건과 관련된 여러 역사적 상황들을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학살을 독촉하는 명령서에 맞서 ‘부당하므로 불이행’했던 문형순 경찰서장의 글귀와 기념관을 나가기 직전에 만난 4.3 희생자들의 맑고 흐린 얼굴들이었습니다. 귀한 시간을 내어 생생한 이야기를 들려주신 한상희 교감선생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셋째 날은 영화 지슬의 배경이 되었던 동광리 마을, 동광 주민들 120여명이 숨어 살던 공간인 큰넓궤였습니다. 큰넓궤 역시 목시물굴과 다랑쉬굴처럼 끝내 발각되었고 대부분의 주민들은 정방폭포로 끌려가 학살당합니다.

이어서 간 곳은 한국전쟁 당시 ‘예비검속자’들을 학살한 섯알오름입니다. 이 곳에서 수백명의 제주민들이 아무런 법적 절차 없이 한밤중에 무참히 총살, 암매장되거나 깊은 바다에 수장되었습니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불법주륙기의 상세한 설명을 보면 할 말을 잃게 됩니다.
희생자 추모비 앞에서 은결이가 낭송한 4.3 평화문학상 당선작, 시 검정 고무신은 앞으로도 오래 오래 잊지 못 할 것 같습니다. 당시 희생자들의 시신은 만벵듸 묘역과 백조일손지지 묘역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날 우리가 찾은 곳은 4.3 사건의 출발이라 할 수 있는 관덕정, 그리고 당황스럽게도 한울누리공원 인근에 세워진 박진경 추모비였습니다. 우리가 갔을 때에는 이미 ‘역사의 감옥’이 강제 철거된 이후였습니다. 다시는 그런 비극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과 더불어 그러한 비극을 정당화하는 이들을 저주합니다.
나흘 동안 우리가 해야 할 몫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비극은 끝났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것들이 있습니다. 진상 규명은 반세기가 넘도록 지연되었으며, 유족들은 국가로부터 아직 배상이나 보상을 제대로 받지 못 했습니다. 제대로 된 이름조차 아직 없습니다. 겨우 2014년에야 4.3 희생자 추념일이 법정 기념일로 지정되었습니다. 여전히 국민 10명 중 3명은 4.3 사건에 대해 모른다고 답합니다.

잘못을 그냥 두면 그 빚은 결국 우리가 감당해야 하며, 우리 다음 세대가 감당해야 합니다. 심술궂고 비정한 역사 속에서도 우리가 발견한 작은 빛처럼 앞으로 우리도 우리만의 빛을 찾아가려 합니다. 우리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고 이 곳을 방문하려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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