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동학농민혁명의 발자취를 찾아서.
수원 1모임 선생님들과 함께 7월 1일과 2일, 1박 2일 동안 동학농민혁명의 유적지를 답사하였습니다.
첫 날 찾은 곳은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장성 황룡 전적지였습니다. 죽창 모양의 탑과 조형물에 새겨진 장태, 그리고 결의에 찬 농민군들의 생생한 표정이 마음에 오래 남았습니다. 한 켠에 초라하게 남아있는 이학승 순의비와 대비되어 농민군들의 힘찬 눈빛이 더욱 빛나보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어서 간 곳은 당시 사발통문을 작성했던 집, 무명 동학농민군 위령탑, 그리고 혁명의 발단이 되었던 고부봉기의 현장, 고부관아터였습니다. 그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위령탑에 조각된 두 사람, 최루탄을 맞고 쓰러지는 이한열 열사와 그를 안고 있는, 죽창을 손에 든 농민군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이 여기 남아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이 6월 민주항쟁을 거쳐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었습니다. 당장은 실패로 끝났을지언정 길고 긴 역사 속에서 분명 승리하는 순간이 온다는 사실을. 마침내.
이어서 간 곳은 동학농민혁명 최초의 승전지인 황토현 전적지, 그 곁에 조성된 동학농민혁명 박물관과 추모관, 욕 나오는 만석보터, ‘앉으면 죽산, 서면 백산’이었습니다. 추모관 안에 가득한 이름들은 모두 합쳐도 채 4,000명이 되지 않았습니다. 유족 등록 신청을 연중 받고 있다는 홍보에도 불구하고 2022년 이후부터 비어있는 이름칸을 보며, 헌화도 디지털로 하는 시대에 더 이상 유족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 서글프기도 했습니다. ’났네 났어 난리가 났던‘ 어지러운 시대를 살아낸,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을 기억하겠습니다.
다음 날 찾은 곳은 전주읍성에 남은 유일한 성문인 풍남문, 천주교 성지이자 김개남의 처형지였던 완산칠봉 초록바위, 그리고 완산칠봉에 조성된 녹두관이었습니다. 20여년 전 북해도 대학에서 모셔온 한 농민군 지도자의 유골이 안장된 묘와 앳된 얼굴을 한 그의 흉상이 가장 기억에 남았습니다.
답사의 마지막 장소는 핏빛 동백이 진 곳, 송장배미라 불리우는 공주 용못과 우금티 전적지였습니다.
이틀간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를 돌아보며 숨막히는 더위보다 가는 곳마다 찾는 이가 없는 숨막히는 고요와 적막이 더 안타까웠습니다. 그리고 그 안타까움은 아이들을 데리고 언젠가 꼭 다시 오고 싶다는 생각으로 점차 변해갔습니다. 여러모로 추진이 쉽지 않은 상황이지만, 그들이 그들의 재를 넘었듯, 우리도 우리들만의 재를 넘는 또 다른 방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분명 갑오년에 쏜 총알은 아직도 날아다니고 있으며, 우리 아이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지금도 결코 안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